중국 전통의상 치파오

 

최만지<崔万志>라는 중국의 치파오를 판매하는?

(그냥 호칭을 최만지 이라고 하겠다. 읽기편하고 쓰기편하기위해 존칭을 간략하고싶어서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에대한 존중은 크면컸지 적다는것은 아니니 구독자분들 이해해주길바란다.)

 

이분은 1976년 3월 안휘성에서 자랐고 전자상무유현공사의 이사장을 맡고있고

최지련치파오의 CEO, 뎨련복장사, 절강대학의 강사, 알리바바의 ,NCC전문가.

 

하지만 그는 태여날때부터 장애인이 되었다.

엄마속에서부터 탯줄이 목을 감고있었고 머리의 산소공급부족으로 언어적 신체적장애를 얻었다.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을 깨물었다고 말했다.

제대로 걸을수가 없기에 걸을걸이는 삐뚤삐뚤...얼굴은 안면근육의 이상으로 말을 더듬더듬 천천히 .

 

하지만 이런 장애인 최만지는 자신의 회사가 있다.

연매출 중국인민폐 천만위엔을 돌파하고.

2002년 전국인터넷상업이 10위안에들었다.

 

그는 언어상에는 장벽이 있으나 기적을 만들수있다고 믿고있다.

어떤사람들은 이분보고 <치파오선생>이라고 한다.  

예전에 1분안에 4천여벌의 옷을 팔기도하였다.

사람들은 궁금해하기시작한다.

어떻게 1분안에 4천여벌을 팔수있는지.

이시대에는 후롄왕의 시대이다.중국아니 전세계가 후롄왕의 열풍으로 들끌었다.

 

(자 그럼 여러분 이분의 이야기 궁금한지요?

제가 천천히 이분의 이야기를 알려드릴께요,

지루해하지 마시고 저와함께 이사람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해주고 조금만 공감해주고 조금만 감동을 가지고 이페이지를 나가신다면

저의 기쁨은 이보다 더클수는 없을꺼에요.)

 

최만지의 어릴적 학교성적은 항상 3위안에 들었고 드디어 고중생이 되었는데 어디에도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성적이 되는 유명 고중학교를 찾아가서 받아달라고 무릎까지 굻었지만

거기서 졸업을 해도 그의 이름하나때문에 자신의 학교에 먹칠을 할수가 없다고

그의 아버지와 그의 앞에서 말을하고 그의 침대에 펴놓은 이불와 짐을 사람과 함께 학교밖으로 내쫗았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그자리에서 울고있었다.

 

그누군가 그에게물었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하면 그래도 서운한 마음과 슬픈마음이 있죠?

이때 그는 놀라운대답을 했다.

그는 이모든것이 다 나에게 있어서 제일 좋은 안배였다고 했다.

이 하나의 사례만 보아도 그는 어떤 인성을 갖고 이세상을 살아왔는지를 우리는 충분히 알수있다.

 

 

 

 

왕점<网店> 최만지는 그냥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지금 이시대는 이런왕점은 수천만점들이 있다.

하지만 14년전에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파는게 없을 당시에

최만지는 자신의 아내와 내기를 하였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팔수있는지에대해서.

최만지는 중국인터넷에 QQ号를 팔았다.

 QQ号는 중국 사람들이 인터넷을통해 서로 문자를 주고받거나 자신의 블로그도 만들수있고 사진대용량 저장과

일기가 있고 모르는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다용도로 사용을 하는것이다.

 

이때 최만지는 인터넷으로 QQ号를 하나 팔았다.

인민폐 20위엔을 벌었다. 14년전의 일이다.

이렇게 매일매월마다 인터넷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떤때는 제일높이 한달에 5천위엔을 벌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2007년 후롄왕에다가 20만위엔을 다 왕점에 투자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에서는 다들 반대를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화가나서 밥도 못드셨다.

그의 가족들은 이 후롄왕을 믿지 않았다.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것에 자신의 모든 돈을 투자를 하니 너무나 어리석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을 6개월동안 견지하고나서야 자신의 모든 돈을 다 잃고말았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보복을 받았다고 비난하였다.

아내는 그가 가족의 만류에도 그가 하겠다고 나서서 이렇게된것이라고 탓했다.

하지만 그는 이게 꼭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복이라고 믿지 않았고 계속 이를 견지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수없었던 이유가 후롄왕이 자신의 미래가 될것이라고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실패앞에서 포기를 할수가 없었다.

 

최만지의 치파오세대

2008년 그는 다시 시작을 했다. 4대의 재봉틀과 4명의 재봉틀사를 구했다.

옷을 하나가 팔리면 옷하나를 만들고 이렇게 반년이라는 세월이 또 흘렀다.

점점더 좋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2008년 그는 이렇게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면서 중국인민폐 백만원을 기록하게되었다.

2009년 그는 천만원 2010년 삼천만원 2011년 5천만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는 자신이 후롄왕열풍위에 선 돼지 같다고 비유를 했다.ㅎㅎ

 

하지만 2012년에 전자상무가 들어오면서

대량의 중국전통기업들이 전자상무에 들어가면서 타오바오의 왕점은 원래 몇십만 가구에서 몇천만가구로 불어난것이다.

2011년까지 최만지는 일을 하면서 승승장구를 했지만 2012년의 이런 위기는 처음 경험을 해본것이다.

이타격은 최만지로 인해서 많은 빚을(3백만원어치)의 짖게 되었다.

집에도 갈수가 없고 핸드폰을 볼수도없었다.

밥도 먹을 수없고 잠을 잘수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때도 그는 어떻게 해야되냐고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엇다.

2달동안의 고민끝에 아니 고뇌끝에 그는 의류상을 포기하고 치파오만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때도 모든사람들은 반대를 했다.

(너 거리에서 치파오를 입는사람을 봤어??)라고

치파오를 해서 누구에게 입히려고 그러느냐면서 .

 

하지만 그누구도 그의 의지를 꺽을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을 했다.

만약1000명중에 1사람이 치파오를 입는다면 중국에 백만가구의 시장이 있다는것이다.

인구수 중 중국은 제일 압도적이다.이비율을 따져서 최만지는 말을 한것이다.

 

2013년 그는 4백만원의 빚을 안고  치파오는 시장을 열었다.

그는 매일저녁 치파오의 문화를 연구하고

치파오의 설계와 치파오의 공예, 치파오는 어떻게 영업을 하는지를 연구하였다.

이렇게 그는 1년을 버티고 끝내 천만원을 벌게되었다.

또 1년이 지나고 사천만원을 벌고 

이런 기적은 후롄왕업에서만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003년 20원으로부터 시작해 백만원 부터 시작해 수천만원까지

하지만 다파산되고 4백만원의 빚부터시작해 또 천만원에서 오천만원까지

그는 수없이 벼량끝에서 떨어지고 또 산을 천천히 오르기를 반복했다.

이런 자극은 그에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라는 말은 그를 지금까지 올라오게 한 동력이 되었다.

 

더 많은 말이 필요한가 이사람의 수많은 고통과 상처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이상이다.

 

 

 

우리는 돈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이 하는 일도 부러워한다.

돈을 많이 벌고 명성도 얻고 그런업적을 우리는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숨겨진 뒷모습의 인내와 고통 열심히 사는건 우리가 자세히는 알수는 없지만

또한 그냥 무관심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걸어서 지금까지 여기까지온 내력을 알고싶다.

그냥 겉모습이 아닌 어떤사람인가부터 알고싶어진다.

 

이사람의 용기는 그누군가가 모방은 할수있을지는 몰라도 이사람의 마음과 지혜와 사랑은

똑같을수가 없다.

 

이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글이구나 하고 훅훅 내려가서 쑥하고 나오겠지만

나는 내가 쓴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주인공을 통해서 삶의 힘을 얻길바란다.

세상에는 많은 감동과 행복들이 있다.

타인의 이런 삶이 우리에겐 감동으로 다시 삶을 이어가는 용기를 주고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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